사진으로 보는 제국의 무덤(the graveyard of empires), 아프가니스탄(Afghanistan)

 

 

미국의 작가 제임스 미치너(James A. Michener)1955년 역사소설을 쓰기 위한 조사를 하기 위해

아프가니스탄에 갔을 때, 아프가니스탄에는 도로도 거의 없었다. 그러나 이미 아프가니스탄에는 미국과

러시아가 들어와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후에 미치너의 소설 속 주인공은 미국 외교관에게 언젠가

미국과 러시아가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할 것이며, 미국과 러시아 모두 후회하게 될 것이라 말했다.

 

미치너의 혜안은 뛰어났다. 그러나 그렇게 소름 돋을 만큼 놀라운 일은 아니었다. 그 당시에도 이미 아프가니

스탄을 부르는 다른 말이 바로 제국의 무덤이었기 대문이다. 물론 누가 가장 먼저 제국의 무덤이라는 말을

썼는지는 논쟁의 여지가 있지만 말이다.

 

사실 아프가니스탄에 침공한 모든 제국들이 단지 그 이유만으로 무너진 것은 아니었다. 아마 이 별명에 대한

더 좋은 설명은 바로 아프가니스탄이 제국들의 전쟁터였다는 점일 것이다. 풍부한 자원을 차치하고라도, 아프가니

스탄은 지정학적으로 축복받은 땅이기 때문이다. 혹은 저주이거나.

 

19세기, 영국과 러시아는 아프가니스탄의 황량한 사막과 험준한 산맥을 배경으로 그레이트 게임, Great Game”

벌이고 있었다. 20세기 말이 되자 냉전이 벌어져, 미국과 소련은 아프가니스탄에서 게릴라전을 펼쳤다. 그리고 21세기,

다시 아프가니스탄은 테러와의 전쟁에서 핵심적인 지역이 되었다.

 

그리고 3제국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은 사진의 시대와 맞닿아 있었다. 그 덕분에 수많은 영광과 실패의 장면들이

그대로 사진으로 기록 될 수 있었다. 하지만 지난 2세기동안 아프간의 풍경은 그리 많이 변하지 않았다.


1. 영국

80여년동안, 영국은 아프가니스탄에서 3번의 전쟁을 치루었다. 영국은 그 동안 이 나라를 점령하고 지배했으며

또 패배했다. 수만명의 희생자를 내고, 1차대전으로 쇠약해진 영국은 결국 1919년 아프가니스탄의 독립을 승인했다.

 

 

1880년 아프가니스탄 Circa. 영국관리들과 수행원들

 

19세기와 21세기, 아프가니스탄의 시골 풍경의 변화가 거의 없음을 확인시켜주는 이 사진들은 참으로 놀랍다.

그 당시 흙벽으로 만든 요새는 여전히 아프가니스탄 전역에 지금까지 남아있다. 그리고 이 요새 중 일부는

지금까지 군사용으로 사용되고 있다.

 

아래 사진은 영국 점령기 1879년 세워진 요새 Qala-i-Jang이다. 이 요새는 2001 21세기 미 CIA 요원의 첫번째

전사자가 나왔던 전투로 유명하다.

 

1879년 카불을 점령한 영국군

 

1910년, Khyber pass에서 총을 쏘는 아프간인들

 

1929년 Nadir Khan에게 점령된 직후 카불의 모습. Nadir Khan은 이후 4년동안 아프간을 지배했다

반군의 복장이나, 친정부 군인들의 복장 역시 영국 점령기와 크게 변하지 않았다.

 

이 시기를 배경으로 하는 플래시맨은 스코틀랜드의 작가 조지 맥도날드의 첫번째 역사 시리즈 물이다.

이 소설의 주인공 플래시맨은 거짓말쟁이에 겁쟁이임에도 불구하고 영국군 역사상 최악의 패배였던

1842년 카불 철수에서 간신히 살아남아 영웅이 된다. 플래시맨은 물론 허구의 인물이지만, 아프가니

스탄에서의 영국의 전쟁에 대한 본질을 묘사할 때 현재와 동일한 관점을 보여준다.  

불안정한 시기에 문제를 일으킬 기회를 놓치지 않은 부족장들과 폭군들이 많았습니다.” 플래시맨이 말했다.
우리 군대는 큰 문제가 일어나는 것을 막고 있습니다. 지금으로서는 말이죠. 그러나 그러기 위해서는 작은 요새들을
순찰하고, 군대를 배치하고, 탐욕스러운 부족장들을 매수해야 하죠. 사람들은 우리가 얼마나 오랫동안 그럴 수 있을지
의문을 가지고 있습니다.”

 

1879년 대영제국 아프간 특명 대사 루이스 카바나리 경의 사진. 이 사진을 찍고 2달후, 그는

카불에서 아프간 반란 사건으로 사망했다. 이 사건은 1879년 전쟁으로 이어졌다.

1878년 제 2차 아프간 전쟁 당시 카불 인근의 Bala Bug

 

 

영국인들은 카불에서 철수해야 했지만, 다음 전투에 다시 돌아와 결국 아프가니스탄 인들을 격파했다.

이는 영국에겐 많은 교훈을 주는 경험이었다.

 

영국군의 군종 목사였던 G.R Gleig는 이를 이렇게 기록했다.

현명하지 못한 목적에서 시작된 전쟁은, 무모함과 겁쟁이의 이상한 혼합으로 진행되었다. 고난과
재앙을 겪은 후, 전쟁을 지도한 정부 그리고 이를 수행한 군대에게도 그리 큰 영광을 주지 못했다.
전쟁에서 단하나의 정치적 혹은 군사적 이익도 얻을 수 없었다.


2. 소련

전후 소련은 중앙아시아의 공화국들에 평화를 가져오고 근대화 하면서 큰 성공을 거두었다. 그러나

소련은 같은 정책을 아프가니스탄에도 적용할 수 있다는 오판을 했다. 소련은 1979년 내전을 진압하고

아프가니스탄 정부와 동맹을 공고히 하기 위해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했으며, 10년 후인 1989년 철수했다.

 

1898년, 소련 최정예 제 103 공수사단 대원들이 고지에서 경계를 취하고 있다.

 

소련은 학교와 도로 공공기관 그리고 여성의 자유를 아프가니스탄에 가져왔다. 그러나 미국과 파키스탄

그리고 사우디아라비아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은 아프간의 반군들은 소련의 이런 시도에 반발하며 소련에

대한 성전을 선포했다.

 

이는 모든 면에서 잔혹한 전쟁이었다. 아프가니스탄 전쟁에 참전했던 소련의 군인이었던 작가 미하일

에브스타피에프의 소설 천국에서 2걸음에서 작가는 오늘날에도 익숙한 영원한 갈등에 대한 묘사를 했다.

 

시간이 갈 수록, 왕궁 주변에 수 많은 군사 시설이 들어서기 시작했다. 화학무기들이 투하되었고, 소련군은
삼엄하게 아프간 사람들을 감시했다. 모두들 예상했듯, 카불에서도 소련의 영향력이 미치는 곳은 일부분에
불과했다.”

 

반소련 레지스탕스 전사들이 파키스탄 국경 인근 쿤나르 주의 산에서 이동하고 있다.

1980년, 쿤나르 주 인근 산에서 무자헤딘 반군들

1988년, 무자헤딘 반군들이 소련이 방치해놓고 떠난 무기를 점검하고 있다.

 

아프간과 소련의 거리는 세기, centuries’로 측정해야 했다. 사람들은 오로지 철조망, 탱크, 기관총으로
무장된 군부대 안에서만 안전하다고 느꼈다. 아프간 전역에 소련군이 주둔하고 있었지만, 이들은 대양에
있는 작은 섬들 같았다. 본토에서 떨어진 고독한 작은 섬 말이다.”
 

"소련은 수천발의 폭탄으로 아프가니스탄의 풍경을 영원히 바꾸어 놓았으며, 전세계 그 어느지역보다도 많은
지뢰를 매설하여 땅도 파괴하였다. 카불에 세워놓은 허수아비 정권이 무너지자, 더 참혹한 내전이 이어져 수 많은
도시들이 파괴도었고, 결국 1996년 탈레반 정권이 들어섰다."

 

1988년, 아프간 반군이 파키스탄 국경 근처에서 그들이 격추시켰다 주장하는 소련 공격헬기를

확인하고 있다.

1989년, 한 소련군이 테르메즈 인근에서 가방을 들고 기차로 향하고 있다.

1989년, 아프가니스탄에서 철수하는 소련군


3. 미국

미국의 21세기 첫번째 전쟁은 2001 9 11일 참사 직후 이루어졌다. 16년간 계속된 전쟁동안 미군의

적은 무장단체에서 탈레반으로 그리고 다시 IS로 바뀌었지만, 이 전쟁의 끝이 어디인지는 아직도 분명하지 않다.

 

2011년, 미군이 수송헬기에 탑승하고 있다.

 

첫번째 전투는 Qala-i-Jangi 요새에서 벌어졌다. 미군의 전투기에서 투하된 폭탄이 미리 침투했던 CIA

요원의 레이저 유도를 따라 떨어진 것이다.

 

100만명이 넘는 미군 전투요원들이 아프간전에 참전했으며, 미군 2,400명과 NATO와 다른 동맹국

군인 1,100이 전사했다. 아프간군 역시 매년 3~4,000여명 이상이 전사하고 있다. 이 뿐만 아니라 작년에만

3,000명 이상의 민간인의 사망했다.

 

올해 미군의 전사자는 11명에 불과했는데, 이들 중 대부분은 대테러작전을 수행 중이던 특수부대원들이었다.

 

2006년, 미군 제 10 산악사단 소속 장병들이 아프간 남부에서 탈레반의 기습공격을 받고 있다.

2010년, 미 육군 공병대가 칸다하르주에서 마리화나 밭 옆에 있는 집을 폭파시키고 있다.

2010년, 미 해병대가 기습공격이 있었던 집을 수색하고 있다.

2010년, 급조폭발물 공격을 받은 장갑차를 미군이 수습하고 있다.

 

2010, 아프간 내 미군 병력은 10만명 이상으로 늘었으며, 미군과 다른 동맹국들의 군대가 아프가니

스탄의 34개 주 모두에 주둔하고 있었다. 흩어져서 말이다. 마치 소련군이 그랬던 것처럼. 연합군은

고립된 요새에 주둔하고 있었다.

 

현재는 단 몇 개의 주요 기지에 트럼프 대통령의 공약사항이었던 4,000여명의 증강을 포함해 단

12,000여명의 미군만이 이라크에 주둔하고 있다. 반면 아프간 보안군은 소련시대와 거의 유사한

33만명으로 증가했다.

 

2010년, 미군 특수부대원들이 부상당한 아프간 군인을 수송헬기로 이송하고 있다.

2013년, 파크티아 주에서 작전중인 미군 제 101 공수부대의 장병

2001년, 북부동맹의 대원이 탈레반 군인을 사형시켰다.

2001년, 북부동맹 대원이 탈레반이 지배하는 마을을 감시하고 있다.

 

제임스 미치너가 조사를 위한 아프간 여행을 마친 후, 수년이 지나고 누군가가 그에게 물어봤다. 다시

가보고 싶은 나라가 어디냐고. 미치너의 대답은 바로 아프가니스탄이었다. 그의 소설 속 미국 외교관이

말했듯, 아프가니스탄은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솥이었다.

 

흥미롭고 폭력적이며 도발적인 장소라고 생각합니다. 이곳에서 일했던 미국과 유럽의 거의 모든
사람들이 같은 말을 하더군요.”

 

그리고 이는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오늘날에도 미국인들은 다시 아프간으로 돌아가겠다고 말한다.

아프가니스탄에 다시 파병을 하는 것이다.